보물 제564호.
마을 돌담을 끼고 흐르는 실개천 위에 놓인 반원형의 아치로 된 아담한 석교로서,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통행하고 있다. 이 다리는 위쪽 노면이 완만하게 휘어진 경사를 이루고 있다.
1780년(정조 4) 석공 백진기(白進己)의 축조라 한다. 이 다리는 꾸밈새 없이 서민적이고 조선 후기의 민예적(民藝的)인 수수한 멋을 풍겨준다. 홍예(虹蜺 : 무지개모양)를 이룬 부채꼴의 화강석은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다란 이 석재 위에 장대석(長臺石)을 올리지 않고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겹겹이 쌓아올렸다.
그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다리의 양안은 역시 자연석을 쌓은 석축으로, 앞뒤로 길게 연장되어 통로와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쌓은 잡석의 짜임새가 허술한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매우 견고하여 홍수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무지개 다리를 중심으로 양쪽에 좌우로 뻗친 호안(護岸)의 석축이 고색창연한 만년교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감싸준다. 개천이 빠져나가는 홍예의 너비는 11m, 높이가 5m, 홍예 석축의 교폭은 4.5m이다. 다리 입구에는 주민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비석이 하나 있다. 만년교가 처음 완성될 무렵 이 고을에는 신통한 필력(筆力)을 가진 13살 난 신동(神童)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공되던 날 밤 소년의 꿈속에 나타난 노인은 자신이 산신임을 자처하며 “듣건대, 네가 신필(神筆)이라고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다. 다리의 이름은 만년교로 정하겠다.”고 말하였다. 노인이 사라진 뒤 소년은 먹을 갈아 ‘萬年橋’의 석 자를 밤을 새워 써 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다리 입구에 남아 있는 이 비석은 글씨가 기운차고 살아 움직이는 듯 가히 명필임을 알 수 있는데 끝에는 ‘十三歲書’라고 씌어 있다. 개천이 남산(南山 : 咸朴山이라고도 한다.)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라 하여 만년교는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린다.
참고문헌
- 『朝鮮古蹟圖譜』 第10卷(朝鮮總督府, 1930)
- 『교량공학(橋梁工學)』(황학주, 동명사, 1982)
- 「한국의 다리」(반영환, 『서울평론』 35∼51, 서울신문사, 1974)
- 「한국의 교량사(橋梁史)에 관한 연구」(황학주, 『대한토목학회지』 24-3, 1976.9.)
- 「李朝五百年間に於ける模範的石橋」(渡邊彰, 『朝鮮彙報』, 朝鮮總督府, 1973)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